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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색 가능 기간 : 삼국시대 ~ 조선시대 (BC 37 ~ AD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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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천문 검색결과

전체개수 25,360 페이지 1,485/2,536
고천문 검색결과에 대한 양력, 음력날짜와 천문현상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번호 양력날짜
음력날짜
일진 천문현상
10,520 1491년 12월 31일
1491년 12월 1일
계묘 12월 계묘(1)에 유성(流星)이 곤방(坤方)에서 나와서 묘방(卯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병(甁) 같고, 꼬리의 길이는 4-5척(尺) 이었으며, 소리가 우뢰 같았다. [증보문헌비고 상위고 7, 77면]
10,519 1491년 12월 31일
1491년 12월 1일
계묘 신시(申時)에 유성(流星)이 곤방(坤方)으로부터 나와 동방(東方)으로 들어갔는데, 형상이 병(甁)과 같고, 꼬리의 길이가 4, 5척 가량 되었다. [조선실록 [원전] 12집 122면]
10,518 1491년 12월 31일
1491년 12월 1일
계묘 신시(申時)에 유성(流星)이 곤방(坤方)으로부터 나와 동방(東方)으로 들어갔는데, 형상이 병(甁)과 같고, 꼬리의 길이가 4, 5척 가량 되었다. [연려실기술 제15 권 천문전고]
10,517 1491년 1월 3일
1490년 11월 23일
신축 11월 신축(23)에 혜성(彗星)이 허수(虛宿)에 나타났는데 점점 동쪽으로 옮겨 위수(危宿)에 있었고 꼬리의 길이가 1장(丈) 남짓하였으며 동벽(東壁)을 지나 천창(天倉)에 닿았다가 다음해 정월에야 사라졌다. [증보문헌비고 상위고 6, 331면]
10,516 1491년 1월 3일
1490년 11월 23일
신축 관상감(觀象監)에서 아뢰기를, “어젯밤 일경(一更)에 허성(虛星)의 궤도에 약간에 빛이 있었는데, 길이가 3, 4척(尺)이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본 것이 옳은지의 여부를 확실하게 알 수가 없으니, 오늘 밤에 김응기(金應箕)와 조지서(趙之瑞)로 하여금 살펴보고 아뢰게 하라.” 하였다. [조선실록 [원전] 11집 667면]
10,515 1491년 1월 3일
1490년 11월 23일
신축 11월 신축일(23)에는 혜성(彗星)이 허성(虛星)에 나타나서 점점 동쪽으로 옮겨 위성(危星)에 가 있었는데, 꼬리의 길이가 1발[丈] 남짓하였다. 동벽성(東壁星)을 지나 천창(天倉)에 닿더니 이듬해 정월에 비로소 사라졌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 15권 천문전고 93면]
10,514 1491년 1월 4일
1490년 11월 24일
임인 전한(典翰) 김응기(金應箕)와 응교(應敎) 조지서(趙之瑞) 등이 서계(書啓)하기를, “23일 일경(一更)에 허성(虛星)의 궤도에 약간의 빛이 있는 별의 동쪽을 향해 갔는데, 뻗치는 빛이 4, 5척(尺) 남짓하였습니다. [조선실록 [원전] 11집 668면]
10,513 1491년 1월 5일
1490년 11월 25일
계묘 김응기(金應箕)·조지서(趙之瑞)가 서계(書啓)하기를, “지난밤에 약간의 빛이 있는 별이 위성(危星)의 궤도로 옮겨 들어갔고, 또다시 유성(流星)이 소병(小甁)과 같은 모양으로 꼬리 길이가 2, 3척(尺) 남짓한 것이 삼성(參星)의 궤도에서 나와 유성(柳星)의 궤도로 들어가서 없어진 것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조선실록 [원전] 11집 668면]
10,512 1491년 1월 6일
1490년 11월 26일
갑진 김응기(金應箕)·조지서(趙之瑞)가 서계(書啓)하기를, “지난밤 일경(一更)에는 구름이 꽉 끼었으므로, 그 별이 나타나기도 하고 숨기도 하여 있는 곳의 궤도를 알 수 없었습니다. 또 이경(二更) 이점(二點)에는 유성(流星)이 남쪽에서 나와 북쪽으로 들어갔는데, 구름이 꽉 끼어서 출입(出入)한 별의 궤도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는데, 어서(御書)하기를, “내가 보기로는 유성(流星)이 없는 밤은 없다. 만약 길흉(吉凶) 관계를 알고자 하면 마땅히 모양과 빛깔로 점쳐야 할 것인데, 지금 관상감(觀象監)에서는 유성이라고만 말하고 크기와 모양과 빛깔을 말하지 아니하였고, 또 있는 곳을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그렇게 하고서도 천문(天文)을 본다고 하는 것이 옳겠는가? 승정원(承政院)이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도승지(都承旨) 신종호(申從濩) 등이 서계(書啓)하기를,“한 가지의 운물(雲物)에 이상이 있거나 한 가지의 성문(星文)에 변화만 있어도 임금은 마땅히 두려워하여 몸을 닦고 마음을 가다듬어 그것이 없어지게 해야 하는 것이니, 그래서 점후관(占候官)을 설립(設立)하게 된 것입니다. 다섯 위성(緯星)이 하늘에서 운행(運行)함은 상도(常度)가 있는데, 비류(飛流)하는 별에 대해서는 전문(前文)에 갖추어 기록하였으니, 이는 변이(變異)를 기록하기 위한 것입니다. 신 등이 비록 감석술(甘石術)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천상(天象)을 관찰해 보면 유성(流星)이 없는 밤이 없는 것은 진실로 성상(聖上)의 하교(下敎)와 같습니다. 그런데 관상감(觀象監)에서는 아뢸 때마다 각 경(更)에 일이 없었다고 하였으니, 그 성심껏 관찰하지 않은 것이 이와 같습니다. 전사(前史)에서 유성에 대한 것을 기록함에 있어서는 시작한 곳과 간 곳의 분야(分野)와 모양·빛깔이 어떠했었는지를 갖추어 기록하였는데,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그 감응(感應)의 소재(所在)와 감응의 지속(遲速)과 대소(大小)에 대한 것을 점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성관(星官) 등이 아뢴 것은 조금도 그러헤 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매우 그 맡은 바 직무(職務)를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청컨대 관상감의 제조로 하여금 엄하게 규찰하게 하소서.'' [조선실록 [원전] 11집 668면]
10,511 1491년 1월 6일
1490년 11월 26일
갑진 김응기(金應箕)·조지서(趙之瑞)가 서계(書啓)하기를, “지난밤 일경(一更)에는 구름이 꽉 끼었으므로, 그 별이 나타나기도 하고 숨기도 하여 있는 곳의 궤도를 알 수 없었습니다. 또 이경(二更) 이점(二點)에는 유성(流星)이 남쪽에서 나와 북쪽으로 들어갔는데, 구름이 꽉 끼어서 출입(出入)한 별의 궤도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는데, 어서(御書)하기를, “내가 보기로는 유성(流星)이 없는 밤은 없다. 만약 길흉(吉凶) 관계를 알고자 하면 마땅히 모양과 빛깔로 점쳐야 할 것인데, 지금 관상감(觀象監)에서는 유성이라고만 말하고 크기와 모양과 빛깔을 말하지 아니하였고, 또 있는 곳을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그렇게 하고서도 천문(天文)을 본다고 하는 것이 옳겠는가? 승정원(承政院)이 의견은 어떠한가?” [조선실록 [원전] 11집 66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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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간행년 세차 발행기관
표지제 권두서명(한글) 면수 기술언어
임금재위년 권두서명(한자) 크기(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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