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정보
서명 | 간행년 | 세차 | 발행기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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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제 | 권두서명(한글) | 면수 | 기술언어 | ||||
임금재위년 | 권두서명(한자) | 크기(cm) |
국가, 재위임금, 천문현상, 참고문헌을 선택하여 날짜별 천문현상을 조회하실 수 있습니다.
번호 | 양력날짜 음력날짜 |
일진 | 천문현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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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20 |
1491년
12월
31일
1491년 12월 1일 |
계묘 | 12월 계묘(1)에 유성(流星)이 곤방(坤方)에서 나와서 묘방(卯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병(甁) 같고, 꼬리의 길이는 4-5척(尺) 이었으며, 소리가 우뢰 같았다. [증보문헌비고 상위고 7, 77면] |
10,519 |
1491년
12월
31일
1491년 12월 1일 |
계묘 | 신시(申時)에 유성(流星)이 곤방(坤方)으로부터 나와 동방(東方)으로 들어갔는데, 형상이 병(甁)과 같고, 꼬리의 길이가 4, 5척 가량 되었다. [조선실록 [원전] 12집 122면] |
10,518 |
1491년
12월
31일
1491년 12월 1일 |
계묘 | 신시(申時)에 유성(流星)이 곤방(坤方)으로부터 나와 동방(東方)으로 들어갔는데, 형상이 병(甁)과 같고, 꼬리의 길이가 4, 5척 가량 되었다. [연려실기술 제15 권 천문전고] |
10,517 |
1491년
1월
3일
1490년 11월 23일 |
신축 | 11월 신축(23)에 혜성(彗星)이 허수(虛宿)에 나타났는데 점점 동쪽으로 옮겨 위수(危宿)에 있었고 꼬리의 길이가 1장(丈) 남짓하였으며 동벽(東壁)을 지나 천창(天倉)에 닿았다가 다음해 정월에야 사라졌다. [증보문헌비고 상위고 6, 331면] |
10,516 |
1491년
1월
3일
1490년 11월 23일 |
신축 | 관상감(觀象監)에서 아뢰기를, “어젯밤 일경(一更)에 허성(虛星)의 궤도에 약간에 빛이 있었는데, 길이가 3, 4척(尺)이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본 것이 옳은지의 여부를 확실하게 알 수가 없으니, 오늘 밤에 김응기(金應箕)와 조지서(趙之瑞)로 하여금 살펴보고 아뢰게 하라.” 하였다. [조선실록 [원전] 11집 667면] |
10,515 |
1491년
1월
3일
1490년 11월 23일 |
신축 | 11월 신축일(23)에는 혜성(彗星)이 허성(虛星)에 나타나서 점점 동쪽으로 옮겨 위성(危星)에 가 있었는데, 꼬리의 길이가 1발[丈] 남짓하였다. 동벽성(東壁星)을 지나 천창(天倉)에 닿더니 이듬해 정월에 비로소 사라졌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 15권 천문전고 93면] |
10,514 |
1491년
1월
4일
1490년 11월 24일 |
임인 | 전한(典翰) 김응기(金應箕)와 응교(應敎) 조지서(趙之瑞) 등이 서계(書啓)하기를, “23일 일경(一更)에 허성(虛星)의 궤도에 약간의 빛이 있는 별의 동쪽을 향해 갔는데, 뻗치는 빛이 4, 5척(尺) 남짓하였습니다. [조선실록 [원전] 11집 668면] |
10,513 |
1491년
1월
5일
1490년 11월 25일 |
계묘 | 김응기(金應箕)·조지서(趙之瑞)가 서계(書啓)하기를, “지난밤에 약간의 빛이 있는 별이 위성(危星)의 궤도로 옮겨 들어갔고, 또다시 유성(流星)이 소병(小甁)과 같은 모양으로 꼬리 길이가 2, 3척(尺) 남짓한 것이 삼성(參星)의 궤도에서 나와 유성(柳星)의 궤도로 들어가서 없어진 것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조선실록 [원전] 11집 668면] |
10,512 |
1491년
1월
6일
1490년 11월 26일 |
갑진 | 김응기(金應箕)·조지서(趙之瑞)가 서계(書啓)하기를, “지난밤 일경(一更)에는 구름이 꽉 끼었으므로, 그 별이 나타나기도 하고 숨기도 하여 있는 곳의 궤도를 알 수 없었습니다. 또 이경(二更) 이점(二點)에는 유성(流星)이 남쪽에서 나와 북쪽으로 들어갔는데, 구름이 꽉 끼어서 출입(出入)한 별의 궤도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는데, 어서(御書)하기를, “내가 보기로는 유성(流星)이 없는 밤은 없다. 만약 길흉(吉凶) 관계를 알고자 하면 마땅히 모양과 빛깔로 점쳐야 할 것인데, 지금 관상감(觀象監)에서는 유성이라고만 말하고 크기와 모양과 빛깔을 말하지 아니하였고, 또 있는 곳을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그렇게 하고서도 천문(天文)을 본다고 하는 것이 옳겠는가? 승정원(承政院)이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도승지(都承旨) 신종호(申從濩) 등이 서계(書啓)하기를,“한 가지의 운물(雲物)에 이상이 있거나 한 가지의 성문(星文)에 변화만 있어도 임금은 마땅히 두려워하여 몸을 닦고 마음을 가다듬어 그것이 없어지게 해야 하는 것이니, 그래서 점후관(占候官)을 설립(設立)하게 된 것입니다. 다섯 위성(緯星)이 하늘에서 운행(運行)함은 상도(常度)가 있는데, 비류(飛流)하는 별에 대해서는 전문(前文)에 갖추어 기록하였으니, 이는 변이(變異)를 기록하기 위한 것입니다. 신 등이 비록 감석술(甘石術)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천상(天象)을 관찰해 보면 유성(流星)이 없는 밤이 없는 것은 진실로 성상(聖上)의 하교(下敎)와 같습니다. 그런데 관상감(觀象監)에서는 아뢸 때마다 각 경(更)에 일이 없었다고 하였으니, 그 성심껏 관찰하지 않은 것이 이와 같습니다. 전사(前史)에서 유성에 대한 것을 기록함에 있어서는 시작한 곳과 간 곳의 분야(分野)와 모양·빛깔이 어떠했었는지를 갖추어 기록하였는데,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그 감응(感應)의 소재(所在)와 감응의 지속(遲速)과 대소(大小)에 대한 것을 점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성관(星官) 등이 아뢴 것은 조금도 그러헤 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매우 그 맡은 바 직무(職務)를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청컨대 관상감의 제조로 하여금 엄하게 규찰하게 하소서.'' [조선실록 [원전] 11집 668면] |
10,511 |
1491년
1월
6일
1490년 11월 26일 |
갑진 | 김응기(金應箕)·조지서(趙之瑞)가 서계(書啓)하기를, “지난밤 일경(一更)에는 구름이 꽉 끼었으므로, 그 별이 나타나기도 하고 숨기도 하여 있는 곳의 궤도를 알 수 없었습니다. 또 이경(二更) 이점(二點)에는 유성(流星)이 남쪽에서 나와 북쪽으로 들어갔는데, 구름이 꽉 끼어서 출입(出入)한 별의 궤도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는데, 어서(御書)하기를, “내가 보기로는 유성(流星)이 없는 밤은 없다. 만약 길흉(吉凶) 관계를 알고자 하면 마땅히 모양과 빛깔로 점쳐야 할 것인데, 지금 관상감(觀象監)에서는 유성이라고만 말하고 크기와 모양과 빛깔을 말하지 아니하였고, 또 있는 곳을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그렇게 하고서도 천문(天文)을 본다고 하는 것이 옳겠는가? 승정원(承政院)이 의견은 어떠한가?” [조선실록 [원전] 11집 668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