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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하는 질문

Total 3   
  • 작성일2010-02-23
조선시대에 국가 천문관측과 책력을 담당했던 기관은 관상감입니다. 이 관상감의 전신이 서운관으로 고려 충렬왕 34년 1308년에 설립하여 조선 세종 때까지 천문, 기상, 역서, 지리에 관한 국가 업무를 담당했던 기관입니다. 1818년 순조 18년 관상감의 천문학자 성주덕이 편찬한 "서운관지"에 관상감의 조직, 천체 현상의 종류, 관측 방법 규정, 역법, 행사, 관상감의 할일, 관상감의 역사, 도서목록, 관측 기기 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규장각 도서 목록의 설명을 참고하세요 http://kyujanggak.snu.ac.kr/BA/SGP-039-004188.htm )



서운관지에 따르면 관상감은 천체 현상을 23종으로 나누고 이를 비상시와 통상 시로 나누어 천문학자의 배치와 관측규정을 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혜성의 출현 따위의 비상시에는 출현시각, 모양과 정도, 위치변화 따위를 엄밀한 규례에 따라 "성변측후단자"를 4통 작성하여 승정원, 당후, 시강원, 내각에 각각 1편씩 제출하고, 관상감에서는 관상감일기와 "천변담록"에 기재하여 원본을 보존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천문관측기록은 "성변측후단자", "천변담록", "관상감일기"에 관측기록이 보존되어 있을 것이고, 2차로 "승정원일기", "당후의 기록", "시강원의 기록", "내각의 기록 "에 각각 남게 되었을 것입니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승정원 일기를 제외하고 나머지 네 가지 기록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실록을 편찬할 때 승정원 일기를 자료로 썼을 것이므로 조선 왕조 실록에도 남아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천문관측기록은 "성변측후단자" "천변담록"이 있습니다. 이 자료에 관하여 한국천문연구 홈페이지 "우리나라의 천문학"란이나 http://astro.snu.ac.kr/~sha/ 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성변측후단자나 천변담록은 현재 많이 사라지고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몇 권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 작성일2010-02-23
묘성, 혹은 좀생이별이라고도 하는 플레이아데스 성단은 산개성단입니다. 서양에서는 "seven sisters"라고도 하고 이웃 일본에서는 "수바루"라고도 합니다.



황소자리에 있는 이 성단은 18세기말에 메시에에 의하여 메시에 목록 (M45)에 수록되었습니다. 아마도 이때에는 구상성단과 산개 성단이란 개념이 명확하지는 않았을 터이지만 성단으로 분류되었습니다. 1888년에 발표된 드레이어의 NGC 목록이나, 그 이후인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걸쳐 드레이어가 발표한 IC 목록에는 이 성단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이들 목록에는 은하, 구상성단, 다수의 산개성단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성단의 개념은 샤플리가 구상성단을 연구한 1920년대 이후에 성립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성단은 산개성단 목록에 Mel 22로 등록되었습니다.
  • 작성일2010-02-23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모두 이당시에는 농업을 기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와 밀접한 관계로 천문학이 발달하였습니다. 첨성대 647년 신라 선덕시절 지어진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천문대이며 물리학적 지식까지 응용하여 축조되었다고 합니다.



((사진과 내용은 다음을 잘 참조하세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첨성대처럼 논란이 많은 문화재도 없다. 그것은 첨성대의 쓰임에 관한 이견 때문인데, 어떤 이는 천문관측대였다고 하고, 나침반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자오선의 표준이 되었다고도 하며, 천문대의 상징물이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첨성대의 의의는 그 자체가 매우 과학적인 건축물이며 돌 하나 하나에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을 터이다. 전체적인 외형을 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 즉 사각형의 2중 기단을 쌓고 지름이 일정하지 않은 원주형으로 돌려 27단을 쌓아올렸으며, 꼭대기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돌을 엮어놓았다.



각 석단의 높이는 약 30cm이고 화강암 하나 하나가 같은 형태이지만, 각 석단을 이루는 원형의 지름이 점차 줄면서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3단과 15단의 중간에 남쪽으로 네모난 방을 내었는데 그 아래로 사다리를 걸쳤던 흔적이 남아있어, 이 창구를 통해 출입하면서 관측하였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증거가 된다. 이 창구 높이까지 내부는 흙으로 메워져 있다.



첨성대를 쌓은 돌의 수는 모두361개 반이며 음력으로 따진 일년의 날수와 같다 원주형으로 쌓은 석단은 27단인데, 맨 위의 정자모양의 돌까지 따지면 모두28단으로 기본 별자리 28수를 상징한다. 석단 중간의 네모난 창 아래위 12단의 석단은 12달 24절기를 의미한다고 한다. 첨성대 꼭대기의 井자모양의 돌은 신라 자오선의 표준이 되었으며 각 면이 정확히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킨다. 석단 중간의 창문은 정확히 남쪽을 향하고 있어 춘분과 추분 때에는 광선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치고, 하지와 동지에는 아래 부분에서 광선이 완전히 사라져 춘하추동을 나누는 분점의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첨성대는 갖가지 상징과 과학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미적으로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둥근 하늘과 네모난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과 원형을 적절히 배합해 안정감 있고 온순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맨 위 정자석의 길이가 기단부 길이의 꼭 절반으로 된 것도 안정감을 표현하는 데 한몫하고 있다.



첨성대는 높이 9.108m, 밑 지름이 4.93m, 위 지름이 2.85m이며, 제27대 선덕여왕 재위 중(632~647년)에 축조되었다.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은 1920녀대 첨성대의 모습이다 (자료출처 : 경주관광개발 공사 홈페이지, 경주의 옛 사진집). http://junggak.dongguk.ac.kr/~dg19310620/down/3.html